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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홍성흔 코치 MEMORIES

dugout*** (dugout***)
2017.11.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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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문을 연 ‘한국야구의 자랑’ 홍성흔 코치

 

한국야구 사상 첫 메이저리그 코치가 탄생했다. 해외 무대 경력도 없는 국내파 출신 홍성흔이다. 신인왕을 시작으로 6차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수많은 기록을 남긴 홍성흔은 은퇴 후 다양한 분야에서 새 인생으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가장 밑바닥을 선택했다. 선수 시절부터 꿈꿨던 미국에서의 도전이 간절했기 때문. 무작정 날아간 빅리그에서 그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 했던 가능성을 열었다. 낯선 땅에서 성실함 하나로 부딪혀 이뤄낸 홍성흔이 새롭게 펼쳐진 야구 인생에 시동을 걸었다.

 

Photographer황미노 Editor 표권향

 

 #. 꿈이 아닌 현실, 나는 MLB 코치다! 

 

2017년 9월 지도자 연수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홍성흔이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정식 코치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이는 한국야구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경사였다. 홍성흔,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달렸고, 십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단독으로 빅리그를 밟았다. 전 세계 야구판에 한국야구의 위상을 또 한 번 알린 것이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때 기분을 말해줄 수 있는가.

3년을 보고 왔는데 7개월 만에 ‘Congratulation!’이라는 말을 듣고 ‘Oh, my God! Thank you so much’라고 대답했다. 바로 와이프에게 전화해 ‘기쁜 소식이 있다. 해낸 것 같다’고 말하는데 손이 많이 떨렸다. 솔직히 다른 이야기도 들은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웃음) 다음날 물어보니 정밀검사, 초봉, 팀과 보직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가족에게도 큰 자랑이었을 것 같다.

연습경기로 처음 펫코 파크에 도착했을 때 실감했다. 가족과 동행했는데 정말 축하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구단 관계자들과 코칭스태프가 와이프와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줬다. 죽기 살기로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더 올라갈 수 있도록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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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 A.J.프렐러 단장이 코치직을 제안했다.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은 아니다. 구단이 코칭스태프의 지도력과 성실함, 평소 모습과 선수들과의 관계, 영어 수준 등을 매일 체크하여 인스트럭터-코디네이터를 통해 보스에게 보고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바로 내보낸다. 그런데 총괄 담당자인 샘이 단장에게 나를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차며 선수들이 좋아하고 예의 있으며 매일 야간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받는다고 알렸다더라. 단장이 샘에게 ‘내년에 홍과 같이 할 마음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Yes’라고 대답했다.

 

메이저리그 출신도 뚫긴 힘든 바늘구멍이다.

짧게는 3~5년을 생각했다. 락커장(?)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떠났었다. 남들보다 일찍 나가 볼을 가져다 놓고 망을 설치했다. 가만히 서 있기 싫으면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 할 일을 찾아야 했다. ‘Do you wanna fungo?’라며 다가가 신나게 쳐주고 볼 주우러 나가기도 했다. 좀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로 첫 목표를 이뤘으니, 내년에도 똑같은 마음으로 임할 것이다.

 

다른 경쟁자들도 많지 않았는가.

아시안 코치가 나까지 4명이 있었다. 이 중 한 일본인 코치는 나보다 일 년 먼저 인턴을 시작했지만 나만 정식코치가 됐다. 5명의 미국 코치들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정리해고 됐다. 그만큼 냉정한 곳이다. 이곳은 코치로서 실력과 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끝이다. (박)찬호 형이 말해줬는데, 한국에서 좋은 코치를 잘 데리고 왔다며 ‘Smart’하다고 인정받았다더라. (웃음)

 

많은 도움을 줬던 박찬호 위원도 기분이 좋았을 것 같다.

구단에서 분위기가 좋다고 하니 찬호 형도 신났었다. 잘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구단에도 난 무엇을 시켜도 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해줬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 바로 찬호 형이다.

 

평소 박찬호 위원과 소통이 많았다.

찬호 형은 후배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선구자다. 스타이기도 하지만 가장 겸손한 사람이기도 하다. 매년 ‘박찬호 야구교실’에 참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야구와 후배들에 관련된 일이면 만사 제쳐 놓고 달려온다. 외롭고 쓸쓸할 때 애리조나로 넘어와 (황)재균이도 불러 맛있는 식당을 많이 데려가 주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한국선수가 빅리그로 올 수 있도록 계속 자리를 마련해줄 듯하다.

 

 #. 갑 of the 갑, 멘탈甲 ‘홍포’가 책임진다! 

 

홍성흔 코치의 첫 마디는 ‘많이 탔죠?’였다. 검게 그을린 피부가 구릿빛을 넘어 다크 초콜릿 빛에 가까웠다. 현역 은퇴 후 대다수가 살이 찌던데 홍 코치는 반대로 핼쑥해졌다. 실제로 체중이 99kg에서 87kg까지 빠졌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터전을 마련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음을 그대로 보여줬다. 몸은 힘들었고 마음은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았으므로 눈물을 훔치며 이 악물고 견뎌냈다. 그렇게 흐른 7개월, 그가 흘린 피 같은 땀이 샌디에이고의 마음을 적셨다.

 

샌디에이고 구단의 첫인상은 어땠나.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200여 명의 선수와 코칭스태프에게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감탄도 잠시 주눅이 들었다. 트레버 호프먼과 노모 히데오가 코치로 있는 곳이다. 처음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인턴이고 며칠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한국야구를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미안하지만, 한국에서의 2천 안타는 인정하되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선수들이 집결한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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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환경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외로움이다.

과정이기에 서럽다기보다 이겨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찬호 형도 진득하니 오래 도전해보라고 응원해줬다. 분명히 해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영어공부 열심히 하며 매일 일기를 쓰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못하면 형 얼굴에 침 한번 뱉는 것이라며 농담을 던졌지만 (웃음) 믿는다는 말이 정말 큰 힘이 됐다.

 

인턴생활을 하면서 월급은 받았는가.

Meal money(식대)도 안 나왔다. 숙소, 음식, 이동수단 등 모두 사비로 해결했다. 올해는 보험도 없이 지냈다. 절대 아프면 안 된다며 참고했다. 그런데 세 군데(손목, 어깨. 다리)에 공을 맞았는데 보험이 안 됐기에 절차가 복잡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피해 주고 싶지 않아 아프단 말도 못 했다. (공을 맞은 어깨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화상을 입은 듯 뻘겋게 부어있었다) 여름에 오한이 왔는데 몸살이 아니라 체했다고 말했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쉬었다. 내년부터는 모든 비용이 구단에서 지급되어 다행이다.

 

아픈데 혼자 방에서 밥 먹었을 때 서글펐겠다.

퇴근하고 영어학원에 가야 했기에 30분 만에 샤워와 저녁 식사를 끝내야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즉석밥을 먹으며 와이프와 영상통화를 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기에 지금 힘들다고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못 하겠더라. 지금 뭐 하는 짓인가도 싶었다. 눈물이 글썽였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천장만 쳐다봤다.

 

말이라도 통했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언어가 가장 답답했을 것이다.

야간학교에 다녔는데 은퇴한 할머니 선생님 반이었다. 영어가 빨리 늘어 코치 미팅에서 알아듣고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수업이 나와 잘 안 맞았다. 아직 이해를 못 해 넘어가야 할 진도가 아닌데 빠르게 진행됐다. 이해를 못 했다며 천천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해도 ‘Okay’라고 대답만 하고는 ‘Next page’라며 넘어갔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웃음)

 

스케줄 파악도 어려웠을 것 같다.

미팅 때 분명히 얘기했는데 내가 놓친 적이 있다. 몇 시 운동인지 몰라 아예 일찍 출근했다가 제일 늦게 퇴근했다. 새벽 5시 30분에 나간 적도 있다. 하루는 쉬는 날인지 몰라 혼자 야구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늦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스케줄이 파악된 후에도 아예 일찍 나갔다.

 

언어의 장벽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쉬운 숙제도 온종일 붙잡고 있지만 남들보다 2~3배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귀가 먼저 열렸다. 하루는 로페즈 코치가 정식 코치가 되려면 리포트를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깍두기 코치가 되기 싫어 ‘디테일하게 들어가자’란 각오로 번역기의 도움을 받다가 틀린 감이 오면 스스로 고쳐 A4 용지에 작성해서 제출했다. 이후 구단이 배터리와 타격 보조를 맡겼다.

 

현재 영어는 어느 수준인가.

그저 ‘Oh, my God! unbelievable~ Wow! Really? Good man’과 같이 감탄사만 했다. 몸짓과 표정이 의사전달의 수단이었다. 지금은 간단하게 물어보고 기본적인 회화는 할 수 있다. 야구용어는 기본은 알지만 디테일한 부분은 분위기로 파악할 수 있는 정도다. 이젠 내가 선수들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이고,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어를 마스터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영어공부를 위해 와이프와 함께 학원을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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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듯 다른 분위기, MLB도 접수한다! 

 

한동안 홀로 지냈다. 혼밥을 싫어하는 홍성흔 코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먼저 찾지 않았다. 그래서 작전을 바꿨다. 개인노트에 이름과 특징을 적어 몇 마디를 던졌다.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3개월 후 하나둘씩 홍성흔 코치의 식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솔직히 이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점점 대화의 주제가 파악됐고 아는 단어가 나오면 질문도 했다. 이젠 메이저리거들이 그를 먼저 찾는다. 덕분에(?) 술에 약한 홍성흔 코치의 주량도 늘었다. 대신 빅리거의 술자리에 한국식 문화가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두 손으로 술을 받고 잔을 부딪칠 때마다 ‘건배’를 외친 뒤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신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함이다.

 

홍성흔하면 넘치는 끼를 빼놓을 수 없다.

안 그래도 호프먼 코치가 나를 보면 ‘Nice dance’라고 말한다. 마이너리그에 온 신입생들이 서로 얼굴을 익히기 위해 장기자랑을 한다. 나도 그날 뉴키즈 온 더 블록의 ‘Step by step’을 췄다.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너 끝내준다! 팬 됐다. 너 진짜 대단한 놈이야’라고 말했다. 야구로 어필한 것이 아니지만. (웃음) 평소 선수들과 있을 때 집중력 있고 파이팅 넘치며 먼저 일을 도와주는 모습에 장기자랑이 플러스 됐다고 했다.

 

좀 더 가까워진 자리였겠다. 다가가는데 자신감이 붙었을 것 같다.

미팅 시간에 메이저리그 선수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있다. 자칫 조용해질 수 있기에 코디네이터가 선수들에게 미리 질문지를 전달했는데 나는 영어를 못 하니까 안 주더라. 스스로 질문할 내용을 번역했고 옆 선수가 문장을 고쳐줬다. 손을 드니 모두가 놀라더라. 코디네이터가 ‘넌 진짜 어메이징하다’고 엄지를 추어 올렸다.

 

누구에게 무슨 질문을 하였는가.

호프먼의 날이었다. 18년 동안 야구하면서 슬럼프가 심하게 왔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해 물었다. 호프먼은 ‘빌리, 좋은 질문이야’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안하지만, 난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더라. 그래도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지 알 수 있어 뜻깊은 자리였다. 덕분에 그날 ‘overcome(극복하다)’이란 뜻도 배웠다.

 

평소 ‘적당히’가 없는 성격이 통했던 것 같다.

남이 보면 싫을 정도지만 눈치 안 보고 열심히 했다. 샌디에이고 코치들도 내가 또 공 주우러 그라운드에 나가면 ‘Hey, Hong! Come on. Don’t move’라고 소리친다. 공 줍지 말고 망 뒤에서 선수들 배팅하는 모습만 지켜보라고 하더라. 코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리포트에 올라가는데 내가 자꾸 움직이면 그들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웃음) 

 

 

 

 

홍성흔 (4).jpg

 

 

정말 가까워졌다. 하지만 관계 안에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서로 간 존중이 없는 몇몇 때문에 화난 경우가 있었다. 그런 선수들 때문에 당황해서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 당시 야구는 잘하는데 존경심이 없고 예의가 없어 루키팀으로 내려온 선수가 있었는데 나에게 실수를 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보드판과 베이스 코치 헬멧, 핸드폰을 모두 부숴버렸다. 구단에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도저히 못 하겠다, 여기서 그만해야겠다’고 전달했다. 그날 저녁 코치들이 모두 내 방에 찾아왔다. 그들은 나와 함께 야구하고 싶다며 이런저런 대화로 격해진 감정을 눌러주었다.

 

어떻게 고비를 넘겼나.

코치들이 결국 결론은 스스로가 내리는 것이라며 잘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때 내가 이들과 한 식구가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 한마디도 못 했던 내가 성실함 하나로 이겨내 이제 겨우 진심이 통했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다음날 구단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딱 잘라서 물었다. 여기에 남아서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선수와의 관계는 어떤가.

구단에서 그 선수에게 강력한 징계를 내리려고 했으나 내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 야구만 잘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코치는 선수의 인성까지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선수들까지 보듬으며 지도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 선수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지금 아주 잘 지내고 있다.

 

 #. 홍포의 인사, 안녕… 그리고 안녕!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두산도 함께 팔 걷어붙이고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국내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정식 코치가 된 선례가 없어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신 안정적으로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일본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홍성흔 코치는 확고했다. 선수로는 이루지 못했지만 코치로서 미국야구에 도전하겠다는 각오를 꺾을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 출신도 직업난으로 허덕인다는 바로 그 미국이었다. 홍성흔 코치는 박찬호 위원에게 주전자를 들고 락커장(?)을 하더라도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고 곧바로 이를 추진했다. 자신을 위해서, 한국야구와 후배들을 위해서 빅리그로 향하는 길을 닦기 시작했다.

 

루키팀은 어떤 곳인가.

신병 훈련소로 보면 된다. 기술과 마인드 등 기초공사를 다지는 곳이다. 또한 나의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단에서도 내가 이곳에서 1년만 더 고생하면서 내가 가진 좋은 에너지와 유쾌한 분위기로 어린 포수들을 지도해주길 제안했다.

 

제자들이 큰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겠다.

같이 성장해간 선수들이다. 마침 한 무리가 싱글A와 더블A로 올라갔다.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이 그곳에 간 것이 신기하고 멋있어 보였다. 선수일 땐 코치들에 대한 고마움은 알았지만 이런 기분일지는 몰랐다. 선수들이 잘한 뒤 만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워해 주는 모습을 보며 ‘이 맛에 코치하는구나’라고 느꼈다.

 

선수에서 코치로 위치가 바뀌었다. 무엇이 가장 달라졌는가.

이젠 대우받는 입장이 아닌 대우해주는 입장이 됐다. 미국은 선수가 먼저 묻기 전까지 절대 지적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장점과 함께 조언해야 한다. 자존심 또한 건들면 안 된다. 즉 당근과 채찍을 같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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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흔 코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코치상은 어떤 모습인가.

선수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코치다. 야구에서 답을 못 찾고 있는 걸 빨리 알아차려야 하고, 답답해하는 부분은 치유해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단점은 묻고 장점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공·수·주에서 A급이 되는 선수로 성장시켜야 한다. 안 되더라도 하는 데까지 포기시키지 않을 것이다. 해보는 데까지 함께 매달려서 고민할 것이다.

 

만약 선수가 먼저 주저앉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 안 풀리는 것에 본인이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빨리 치유해줘야지 단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러려면 야구 외에도 인생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해온 야구를 그만두게 할 순 없다. 물론 힘들겠지만 상담과 보충 훈련 등으로 같이 풀어간다면 분명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농담이라도 상처가 되는 말은 하면 안 된다. 코치도 선수를 존중해줘야 한다.

 

아직 돌아간다는 말이 어색하지만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

올해 포수와 배터리, 타격을 같이 맡아서 도와줬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면 정확한 보직이 정해질 것이다. 아직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없으니 일단 몸이 힘들 수밖에 없다. 내 역할에 맞는 데이터를 받아 스케줄을 구성하겠지만 여전히 배우는 자세로 성실하게 임할 각오는 똑같다. 또 모르는 일이다. 전부 딱 잘라서 아시아인이 메이저리그 감독이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의 꿈은 더 커져간다. 내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모두가 말렸다. 하지만 미쳐버린 도전정신이 막혀있던 구멍을 뚫어 빛을 찾아냈다. 이는 희망을 좇는 이들에게 전한 메시지와 같았다. 인생을 결정하는데 2개의 갈림길에서 머뭇댄다. 판단은 빨리하고 선택한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해 후회하지 마라. 하루살이로 살기에는 억울한 우리의 인생이다. 미쳐라, 목표가 있고 확신한다면 도망치지 말고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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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홍성흔, 샌디에이고파드리스, MLB, 더그아웃매거진, 야구잡지

    • 등급 정윤문경아빠
    • 2017.11.29 13:59
    • 답글

    오우
    홍 화이팅입니다

    • 등급 멀티플레이어
    • 2017.11.29 14:06
    • 답글

    므찌다~~~한국에서 형님 팬들이 열심히 응원할겁니다 뽜이팅 하십쇼~~!!!

    • 등급 박태훈
    • 2017.11.29 16:42
    • 답글

    이만수감독님은???

    • 등급 이상욱
    • 2017.11.30 09:17
    • 답글

    응원합니다
    아들도 초등학교에서 야구하고 있고 아들의 꿈을 이룰수있게 열심히 뒷받침되려하니 홍코치님도 박찬호선수처럼 후배들에게 앞으로 희망이길 바랍니다
    얼마전  아들학교에서 박찬호배야구대회다녀왔는데 정말 박찬호선수는 후배들에게 정말 따뜻한 사람이네요~~~
    홍코치도 지금보다 더 멋진꿈을 이루길 기대할께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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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급 닉네임 어쩌고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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